버킷리스트를 무작정 만드는 일보다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
한때는 여러 버킷리스트와 인생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었다. 서른살이라면, 어른이라면 이런 일들을 해야 할 거라고. 하지만 서른이 되어가는 지금, 버킷리스트를 얼마나 길게 쓰고 그 중 몇 개나 이루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. 오히려 버킷리스트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추려내는 과정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.
처음 버킷리스트는 수능이 끝났던 시절에 세웠던 듯하다. 많이 배우고 많이 경험하고 싶었다. 고전 200권 독파하기, 서른살까지 5개국어 정복하기, 미국에 교환학생 가기, 한자 및 역사를 공부해서 한국학 익히기. 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살아보기. 미국에서 전공 분야인 문헌정보학과 석사를 따기. 미국에서 사서로 일하기. 영화제나 음악회에 1년에 한 번 이상 가기 등등을 리스트에 채워넣었다. 당시에는 저걸 다 이루면 서른 살 즈음엔 지적인 커리어우먼이 되리라 상상했다.
하지만 저 버킷리스트 중 하나도 끝까지 이뤄낸 일은 없다. 끝까지 해낼 만큼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아니었으니까. 고전을 읽으려 애써 책을 사모았지만 책을 펼치지 않았다. 예술적 성향을 키운다고 영화제를 가봤지만, 나는 영화관에 가만히 앉아 2-3시간동안 영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. 클래식 음악이나 음악회를 가도 졸기 일쑤였다. 또 사실 나는 생각보다 외국어를 깊게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. 문장이 조금만 어려워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. 중국어도, 일본어도, 스페인어도 초급 회화를 배우다 그만두었다.
또 사회 초년생이 될 때는 “나를 위한 소비나 새로운 경험”에 대한 동경이 컸다. 휴양지에서 스노쿨링도 해보고싶었고, 호캉스도 해보고 싶었고, 코스요리를 먹어보는 일도 해보고 싶었다. 경제적 자유를 갖게 되자, 남들이 하던 일들 중 좋아보이는 것들을 또다시 리스트에 올리기 시작했다.
하지만 역시 수능 전 버킷 리스트와 다를게 없었다. 하나씩 실현하면서도, 나에게 맞지 않는 리스트라는 것을 또다시 깨달았다. 스노쿨링은 커녕 동네 수영장도 무서웠다. 드라이기 하나 찾기도 어려운 호텔방보다 모든 것을 훤히 알고 있는 우리 집이 더 마음 편했다. 한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었던 코스요리를 먹어봐도,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. 생각보다 요리는 희한한 맛이어서 당황스러웠고 다음 코스가 언제 나오나 기다리는 순간은 지루했다.
왜 버킷리스트를 시도하면서도 감흥이 없었나 생각을 해본다. 남들의 기준에 따라 세운 리스트를 만든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. 고백하자면 버킷리스트를 만들면서 얼마나 대단해보이고 자랑할만한 일인지만 생각하고 내멋대로 리스트를 만들었던 것 같다. 그것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생각해 인터넷에서 남들 버킷리스트 구경하면서 하나씩 옮겨적었던 것 같다.
하지만 버킷리스트를 만든 자체가 완전히 무의미한 과거의 실수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. 버킷리스트에 있는 일을 조금이나마 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취향을 지닌 사람인지, 나의 한계는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았을까. 버킷리스트를 통해 시행착오를 겪으니 내가 하고싶은 일에 남들을 위한 일이 가득하다면 행복하지 않음을 선명히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.
지금까지 내가 알아낸 나는 많이 평범한 사람이다. 물놀이를 싫어하지만 산책을 좋아한다. 고전은 싫어하지만 에세이 보는 것을 좋아한다. 외국어 공부는 여행용 회화가 전부다. 음악회나 영화제는 싫어하지만 대신 여행에서 미술관 한 군데는 꼭 들른다. 스무살 나에게 지금 내 모습을 보여준다면, 많이 시시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. 그래도 지금의 내 모습은 내가 몇 년에 걸쳐 꾸준히 만들어온 것이다.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, 마음이 편안하다.
그래서 이제는 버킷리스트를 가열차게 만들지 않는다. 인생이 유한하다고 해서 모든 경험을 할 필요가 없다. 어떤 경험을 할지 정할 때도 엄격한 선별 기준이 필요하다. 나는 정말 이 경험을 해보고 싶은 것일까? 아니면 이 일을 자랑하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싶은 걸까?
대신, 작은 일이라도 내일 당장 즐겁게 끝낼 수 있는 일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다. 대단한 리스트에 얽매이는 대신 내일 당장이라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. 다른 곳을 꿈꾸기보다는 지금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싶다.
고전 200권을 읽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책 한 장을 읽고 싶다. 파인다이닝 대신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저녁식사가 좋다.